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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따듯했던 서정시대, 마지막 Analog Musician 최준성

지난해 여름 구글 인공지능 ‘마젠타’가 작곡한 음원이 온라인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AI 알고리즘이 예술창작까지 넘보는 테크놀로지의 무한질주에 세상은 흥건히 고무되어 있지만, 휴머니티(Humanity)가 결여된 인공예술의 등장에 표정이 어두워진 한 사람이 있다. 24채널 멀티트렉 믹서에 직접 연주하고 믹싱하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날음악을 만들던 서정시대가 짠하게 그리운 사람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연주자로, 편곡자와 세션맨으로 느리지만 따듯한 시대를 살았던 아날로그 음악의 마지막 뮤지션 최준성씨가 바로 그다.

예술가의 공간은 가히 창작의 발원지라 할만했다. 출입문을 열자 나무캐비넷 위에 팬케익 터너(Pancake Turners)라 불리던 RCA victor턴테이블이 있고, 그 위로 LP음반 한장이 천천히 돌고있다. 전기는 고사하고 태엽을 감아 돌리는 턴테이블 위에서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크루닝(crooning)창법이 흘러나온다. LP음반의 독특한 스크래치 소리가 가슴 저변에 가라앉은 오랜 기억들을 가만히 두드린다. 벽면엔 짤막한 낙서 한줄, ‘Life has surface noise’ 영국의 유명한 라디오 PD 이자 저널리스트인 John Peel의 말이란다.


키보드, 믹서, 스피커, 베이스기타, 색소폰 그리고 드럼스틱 한세트… 공간을 빼곡 메운 악기와 장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일론 클래식기타를 가슴에 안고 최준성씨가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음악과의 조우를 묻자 한참을 생각한다.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전축을 사주셨어요. Kenwood라는 외국브랜드의 고급전축이었는데, 클래식 음반도 몇장 있었고. 차이코프스키, 모짜르트, 그리고 여러 명곡들을 엮어 만든 앨범 이었는데 그 중 세번째 앨범 속에 있던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듣고 엄청 큰 감명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LP를 사모으며 음악감상에 심취했어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이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해보자.’ 이미 곡은 충분히 들어 잘 알고 있으니까 악보만 읽어내면 되겠다 싶었죠. 월광소나타 악보를 입수해서 한참을 들여다 봤어요. 한번도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는 내가 이거 혼자 할 수 있을까 싶더라구요. 한시간 걸려 한마디를 치고 한달이 걸려서야 악장 전체 reading을 끝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악보읽기가 끝남과 동시에 모든 노트들을 다 암기하게 되더라는 것. 그렇게 피아노를 익히면서 음악과의 인연을 맺었죠.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익힌 소나타들, 쇼팽의 발라드 등은 지금도 다 암기하고 있어요.”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혀 쇼팽을 연주하고 기타(Guitar)를 잠난감 삼다 주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우연한 일처럼 이야기하고, 나는 그것이 흔히 말하는 예술가의 태생적 재능이 아니겠느냐 반문했고 그는 편곡가들이 원래 다 그렇다며 손사래를 친다.

“형, 누나가 쓰던 피아노와 기타가 결국엔 다 내 차지가 됐는데 뭐랄까, 장난감 같았어요 악기들이.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심취해 지내다가 서강대에 진학을 하고 학내 그룹사운드 킨젝스에서 건반(keyboardist)을 맡게 되었어요. 거기서 한해 선배였던 드러머(Drummer)’ 전태관형을 만나 이듬해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면서 대중음악에 첫 발을 들여놓았죠. 나중에 태관이형은 친구 김종진씨와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저는 당시 대학생밴드로 조명을 받던 ‘다섯손가락’이라는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한세월을 풍미한 노래들이 있다. 386세대들에게 비오는 수요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던 곡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그 중 하나다. 당시 대학생이라는 풋풋함을 컨셉으로 결성된 다섯손가락의 타이틀 곡이었고, 최준성씨는 그룹에서 베이시스트(Bassist)로 활동했다.


“당시 서울음반에서 대학생그룹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상품화해 밴드를 결성하고 앨범을 발표했는데, 앨범 발표 후 제대로 된 활동도 없이 팀이 해체가 되버렸어요. 그런데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라는 노래가 기대치않게 대박이 나자 기획사에선 멤버를 충원해서 다시 팀을 꾸리게 되는데, 기획사 메니저와 보컬이었던 두헌이, 형순이가 저를 찾아와 팀에 합류해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때 베이스(Bass)기타로 조인하게 됐죠. 예상밖으로 앨범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바람에 쇄도하는 방송스케쥴, 공연스케쥴에 떠밀려 학교 출석이 어려웠을 정도였어요. 한학기를 수업과 활동을 병행하다 어쩔 수 없이 휴학계를 내고 몇개월 정신없이 일하며 세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입영통지서가 날아와서 저는 군입대를 해야했었죠.”


한창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내심 억울했겠다는 질문에 그는 자신을 Optimist라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군입대라는 위기를 모든 관악기들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로 전환시키고 27개월 동안 연주의 폭을 넓혔다.


“군악대에서는 드럼(Drum)을 쳤어요. 원래 군악대는 브라스(Brass)밴드가 기본이거든. 그래서 관악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죠. 아마 군대에서 거의 모든 관악기를 다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에요.군대를 제대하자 태관이형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세컨키보드(Second Keyboard)로 조인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죠. 아시다시피 조용필씨는 그 당시 한국 최고의 가수였고,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일이었기에 망설임없이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그 팀에 합류했더니 대한민국 최고의 팝 피아니스트 이호준선배, 전설적인 드러머 김희연형님, 또 베이스의 신이라고 불리는 송홍섭형, 현재 서울예대 교수로 계시는 재즈피아니스트 정원영형까지 정말 전설적인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 대가들과 함께 저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되어 일본의 동경, 오사카, 나고야, 교토 4개도시 투어공연을 떠났어요. 돌이켜보면 저를 크게 성장시켜준 시간이었고 최고의 연주여행이었어요.”


일본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뮤지션으로써 평생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공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8년 서울 프레올림픽쇼에서의 연주. 그때의 감격을 그는 그의 음악 인생의 하이포인트였다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일본공연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한국은 88서울올림픽 때문에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어요.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그해 5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서울 프레올림픽쇼(Seoul Pre-Olympic Show)를 하게되었는데, 한국가수로는 유일하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팀이 참여했거든요. 글로리아 에스테판, 홀리오 이글리시아스, 영화배우 부룩쉴즈, 밥호프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내한해서 함께 공연하는 무대였어요. 사실 저는 연주를 할 때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무척 떨리더라구요. 아마도 잠실 주경기장에 운집한 13만 관중의 함성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마치 제트기가 바로 옆에서 날아오르는 듯 스테이디움을 완전히 압도하는 그런 소리였어요. 그 함성을 가르며 공연 첫 순서로 조용필씨가 ‘서울, 서울, 서울’이라는 곡을 불렀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날의 전율이 다시 느껴지는데요, 그때가 제 음악인생의 하이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공연, 방송 그리고 녹음 스케쥴이 이어지면서 여러날씩 작업실에서 쪽잠을 자야 할 만큼 바쁜 날들을 보내야했던 그는 직업적인 음악인이 아니라 아티스트로써의 음악에 대한 갈증이 이따금씩 그를 괴롭혔다고 말한다.


“뭔지 모르지만 늘 갈등이 있었어요. 이듬해 위대한 탄생 팀을 나와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어서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평균율, 이색지대 등 그룹활동과 함께 젊음의 행진, 여의도 공개홀 같은 당시 가장 줏가를 올리던 방송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또 그 즈음 신서사이즈(Synthesizer)와 컴퓨터와의 접목이 처음 시도되던 때라 스튜디오에서 편곡과 세션으로 한달씩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바쁜 스케쥴이 이어졌죠. 하루는 KBS행사장에서 방송 녹화를 하고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음악이 좋아서 뮤지션이 됐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송국으로 출근하고 공연장을 거쳐 녹음실로 퇴근하는 샐러리맨 같다는 생각. 좀 우울해지더라구요. 내가 하고싶은 음악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혼란스러워서 그냥 다 손놓고 미국으로 왔어요. 제가 좀 즉흥적인 면이 없지않은데, 주변에서는 이 많은 일들을 다 놔두고 어딜가느냐 만류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보스톤으로 날아와서야 겨우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버클리(Berklee School of Music)유학 시절 이명세 감독의 영화음악 제작을 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간 그는 삼성 DMR 뮤직스튜디오에서 3개월을 꼬박 영화음악 작업에 매달렸다.


“제가 버클리에 입학했을 당시 한국 유학생은 겨우 열명남짓했어요. 한국 재즈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김광민씨, 한상원씨 그리고 정원형씨가 함께 재학 중이었고 한국에는 재즈음악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거든요. 버클리에 입학한 후 그간 산만하게 알고있던 음악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재즈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경이로움에 완전히 빠져있었어요. 그야말로 세계적인 대가들 틈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 학교가 주는 예술적 무드가 너무 좋았어요. 3학년이 시작될 무렵 영화감독 이명세씨로부터 영화음악 제의를 받고 잠시 한국에 들어갔죠. 이명세감독님이 뭐랄까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마인드를 갖고 계신 분이잖아요. 영화 ‘남자는 괴로워’를 제작하시면서 모든 음악을 재즈로만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시더라구요. 당시 한국에는 재즈라는 쟝르가 무척 생경했을텐데 말이죠. 재즈의 거의 모든 쟝르를 영화에 다 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했죠. 비록 흥행은 저조했지만 저로써는 무척 만족스러웠던 작업이었어요.”


졸업생 상위 5%가 받는다는 숨마쿰라우데(Summa Cum Laude)로 버클리를 3년만에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국의 L레코딩회사의 뮤직디렉터로 자리를 잡는다.


“영화음악때문에 한국에 체류할 때 당시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으로부터 티칭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한국엔 재즈를 가르칠만한 사람이 거의 없던 터라 그랬나봐요. 그대로 한국에 놀러앉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학교를 마치고 싶어 고사했어요. 그런데 마침 졸업과 동시에 한인이 운영하던 비교적 규모가 컸던 L레코딩회사에 취업을 하게되었죠. 당시 한국에 있는 가수들이 실력이 출중한 외국연주자들과 함께 앨범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례가 잦았는데 제가 그 앨범들을 맡아 편곡을 하고 여기 뮤지션들과 함께 녹음을 진행하는 일을 맡았거든요.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일이 점점 바빠져가던 즈음 갑자기 한국에서 IMF가 터졌죠. 계약이 하나씩 취소가 되면서 스튜디오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 학교에 들어가야 할지 진로를 놓고 고민을 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제가 혼자가 아니더라구요. 마침 제 아이들이 취학할 나이가 되었고 그 아이들에게 미국교육의 혜택을 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아무리 프로패셔널한 뮤지션이었다 해도 미국에서는 마이너리티잖아요. 그 당시로는 음악활동만으로 생활하기가 녹록치 않았어요. 그래서 갈등 끝에 컴퓨터 프로그램과 어카운팅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느덧 경력 17년 차 회계사로 살고있어요.”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재즈를 공부했지만 그에게는 음악적 호불호가 없다.


“음악이야기라면 삼일 밤낮을 해도 모자라죠.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 음악을 골고루 접해본 셈인데요, 클래식은 언제들어도 품격이 있어 좋고, 스탠다드 재즈와 불루스는 형식이 분명하고 귀에 친숙해서 고전음악처럼 편안하죠. 물론 쉔베르그의 무조주의나 12음계와 같은 현대음악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프리재즈는 난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팝을 비롯해 알앤비,보사노바, 가스펠, 재즈 등 사실 모든 쟝르의 모든 음악들이 다 좋습니다. 비록 힙합이나 랩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독특함이 있어서 재밌고요. 특정 쟝르가 좋다기 보다 제게는 그저 좋은 음악과 더 좋은 음악이 있을 뿐이죠.”


아날로그로 출발해 디지털 세대까지 잇닿아 있는 아티스트로써 요즘 젊은 뮤지션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묻자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억지쓰고 싶지 않다며 조심스러워한다.


“사실 디지털시대가 시작되면서 뮤직 스튜디오를 떠난 엔지니어들이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의연한 결단이 아닐 수 없죠. 디지털은 정보를 보관하기에 최적화된 장점이 있지만 예술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으니까. 휴머니티가 사라진 음악은 과연 누굴 위한 예술일까요? 그리고 요즘은 실력있는 젊은 뮤지션들이 너무 많아요. YouTube같은 정보를 통해 프로들의 연주를 보며 기교나 스킬을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으니 다들 엄청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연주를 해보면 서로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스킬은 뛰어난데, 깊이가 없다’ 이렇게 단순하게 평할 문제는 아니고, 뭐랄까 음악을 숙성시키는 과정이 생략되지 않았나 싶거든요. 이 나이가 되고보니 젊어서는 몰랐던 ‘음악의 넓이와 깊이’가 보인다고 할까요? 마치 시간이라는 긴 터널 끝에서 만나는 빛 같은거죠. 이런말 하면 시대에 뒤쳐지는 꼰대 소리나 듣겠죠? ”


연주자로, 편곡자로, 또 세션맨으로 그가 종횡무진하던 화려한 무대는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지만 그는 한시도 음악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맑다.


“이미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아날로그의 반격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실리콘벨리에서는 낮에는 코딩을 하지만 밤에는 함께 모여 수제맥주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 할 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더욱 강해질테니까. 나이탓이기도 하겠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덧칠이 없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음악을 하고 싶어요.어쿠스틱하고 맑은 음악. 너무 깔끔하고 완벽해서 끌림없는 음악이 아니라 굳이 멋부려서 이야기 하자면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이 담긴 뭐 그런 음악, 누가 들어도 저거 최준성음악이지 할만한 음악 해보고싶어요.”



인생에 더러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자신이 뮤지션으로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는 최준성씨. 지나온 시대의 가치있는 것들을 부여잡고 싶다는 그는 요즘도 일년에 몇차례 버클리(Berklee) 후배들과 가스펠 투어를 하고 틈틈히 로컬콘서트에도 참여하며 음악적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아날로그의 따스함과 휴머니티의 회복’은 테크놀로지의 변방에서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들에게 던지는 그의 소박한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끝나자 안고 있던 클래식 기타를 고쳐잡고 그가 천천히 플러킹(Plucking)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