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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int Jung, Writer

벽장을 열어보다가... Essay by Clint Jung

얼마 전 딸아이의 여덟 번째 생일날, 그녀가 하교하기 전 거실을 꾸며놓고 포장된 선물들을 미리 탁자 위에 쌓아두었다. 현관에 들어선 그녀는 과장되게 기뻐하는 얼굴로 뛰어와선 선물들을 하나하나 집어 귀에 대고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그녀의 리액션은 정말 차세대 배우감이다). 그러면서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이 선물 대부분이 역시 보드게임이죠?


대답이 궁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에도 나는 보드게임 선물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선물 대행 서비스도, 심지어 산타가 주는 선물도 보드게임일 때가 많다. 무엇을 사주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미 몇 년 치의 선물로 미리 구매한 보드게임들이 나의 벽장에 가득 차 있으니까.

오래전에 아동심리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 선물을 주어 결국 그 선물이 나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아이들의 심리에 관해. 초콜릿을 엄마에게 선물하지만, 엄마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자신이 먹게 된다는 얘기를 떠올리니 내가 보드게임을 선물하는 행위 또한 그래보일까 싶다. 아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키덜트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기도 한다. 어찌 됐든 다행스럽게도 딸아이는 보드게임을 정말 좋아한다. 함께 놀기 위해 그녀가 네 살 되던 때부터 시작했던 보드게임 선물 공세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저녁이나 주말마다 함께 어울려 게임을 하며 웃다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이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가족 간의 대화 단절이나 소통의 부재는 오지 않을 거라는 다짐하면서.


지인들과도 가끔 플레이하기도 하는데, 가족만큼 죽이 맞지는 않는다. 게다가 보드게임은 아동용이라는 선입견, 도박으로 빠질 수 있다는 오해, 일하고 먹고사는 것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휴식 시간에서까지 머리를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난색을 보이는 이들도 꽤 많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가족 간의 대화 유도로, 치매 예방 차원으로 좋다고 취미로 권하는 것도, 점점 보드게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Photo credit Clint Jung

사실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다. 보드게임은 집중력과 사고력을 요구한다. 게임 종류에 따라 추리력, 창의력과 더불어 공간 능력과 계산능력에 체력까지 요구한다. 게다가 글룸 헤이븐같은 블록버스터급 전략 보드게임은 메뉴얼이 책 한 권 분량이기도 하고 유행하던 방 탈출게임 등도 영어 독해력이 필요하다. 노는 게 노는 것이 아니고,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전엔 바둑이나 장기 계열의 아발론, 하이브 등의 추상 전략 게임들을 즐겨 했었던 나도 요즘은 추상 전략 게임과 거리를 두고 있다. 뇌세포가 줄어들었는지, 뇌주름이 펴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고, 오랜 고정 상대와 반복되는 같은 전략으로 인해 떨어진 신선도가, 떨어진 기억력이, 딸아이 연령에 맞춘 저연령층 게임들을 주로 하다 보니 발생한 게임 이해력의 하향평준화가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결국 룰이 간단한 딕싯, 루미큐브, 폴드 잇 같은 패밀리 게임이나 텔레스트레이션, 핏, 할리갈리 같은 파티게임에만 익숙해져 간다. 거기에다 부피가 크고 플레이 타임이 긴 게임들보다 웬만해선 테이크 파이브, 후지 플래쉬, 우노 같은 단순한 카드 게임을 선호한다. 입으로는 뇌의 노화 방지를 외치고 있는데, 몸은 복잡한 것들을 기피하고 있다.

Photo credit Clint Jung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 바로 딸아이의 성장이다. 연령이 높아질 때마다 그녀는 더 높은 수준의 보드게임을 원할 것이고,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높은 연령층의 보드게임 플레이를 반강제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최소 틴에이저의 지능을 요구하는 고난도의 협력 게임도, 더 깊은 독해력이 필요한 게임도 도전하게 될 것이다. 벽장에 오래 잠들어 있는 올해의 게임상 수상작들, 진보된 추상 전략, 테마 게임 등도 개봉해서 함께 연구할 수 있다. 뇌에 쏟아질 새로운 자극과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다 보니 입이 귀에 걸린다. 우리는 정말 멋진 취미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꿈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내게 아내가 물었다.


-근데, 애가 사춘기 들어서면 우리랑 놀아줄까? 다들 방문 닫고 안 나온다던데?

Clint Jung, Writer

Stonybrook University 졸업

뉴욕에서 십여 년째 라이센스 제품 제조·판매업체에서 근무 중. <겨울>, <계절 음악>, <나, 그 정체>, <아동심리>, <One Day> 시집을 출간했고, 시와 책 관련 에세이를 기약 없이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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