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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UCH storylab

삶과 예술이 공존하는 방, 케렌시아(Querencia) 그곳에 조각가 장수영 씨가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치명적인 끌림 같은 것은 없다. 난해함도 없다. 암시적이거나 시사적이지도 않다. 그저 살면서 얻는 영감을 따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욕구를 충실히 조각하고 빚는다. “제 작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일부입니다. 작품을 통해 모두의 마음에 평안함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간결한 말투만큼이나 그녀의 예술론 또한 간명하다.

한파가 잠시 쉬어가듯 종일 잔 비가 내렸다. 이런 날은 누굴 만나도 자칫 궂은 만남이기 십상이다. 장수영 씨께 어렵사리 얻은 시간이라 인터뷰를 다른 날로 바꾸자는 말도 꺼내 보지 못하고 빗길을 내쳐 달려왔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밖에서 인기척을 기다리는 동안 열린 커튼 사이로 살림집 겸 작업실을 구분 없이 쓰고 있는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부엌과 거실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 있다면, 그 반대편 큰 창을 따라 작가의 작업대와 작품들이 흩어져있는 또 다른 한 세계가 서로 간 아무 경계 없이 놓여있다. 열정과 영감으로 뒤덮인 뭔가 비밀스러운 아틀리에를 상상하던 내 앞에 ‘삶이 곧 예술이다’라는 단순한 명제하나를 툭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장수영 씨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인터뷰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그녀는 작업하던 흙덩이를 잠시 매만졌다. 실내공기가 건조해서 뼈대에 붙여둔 점토가 자꾸 떨어진다며 몇 번이고 손으로 다져 눌렀다. 테이블로 돌아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아들 이야기로 먼저 운을 뗐다.


“아들이 재활을 위해 학교에 간 이 시간이 제게는 유일하게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라 공연히 마음이 분주하네요. 3년 전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중상을 입고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는데, 요즘 재활을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거든요. 아이가 돌아오면 모든 시간을 아이한테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 있는 이 시간에 집중해서 작업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녀는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아들의 사고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던 걸까? 간간이 눈동자가 흔들리며 슬픈 기색이 보였지만 숱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지럽던 시선이 천사를 새긴 동판 부조 앞에 마침내 멈춰 섰다. 얼굴이 평온해 보인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 소문난 그림쟁이였어요. 그림을 잘 그리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게 제게는 특별한 의미였던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이 스물을 갓 넘긴 어린 나이에 저를 낳으셨고 아래로 동생이 넷이나 되다 보니 저를 되려 많이 의지하셨어요. 알잖아요, 아이를 어른 대접하면 아이가 아이다운 행동을 못 하게 된다는 거. 전 어려서부터 소위 ‘어른이’였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답고 싶었던 내 속의 모든 생각들, 욕구들, 감정들을 그저 그림 안으로 모두 흘려보냈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전공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음악을 시키고 싶어 하셨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태생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예술을, 그리고 미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오일페인팅이 주는 화학물질의 유해독소 때문에 더이상 유화를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심했던 물감 알레르기로 인해 유화를 포기하고 잠시 동양화를 접했지만, 동양화는 뭐랄까 제게 만족을 주는 분야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동양화를 공부하는 동안 예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진지함, 정신적인 어떤 기반들을 배웠던 것 같아요. 이후, 고등학교 미술반에서 조각을 처음 접하고 완전히 매료되었죠. 그 전까지의 모든 미술 작업이 2차원적인 평면 작업이었다면 조각은 입체를 드러내는 3차원이라 표현의 폭이 그만큼 넓거든요. 게다가 흙, 돌, 나무, 쇠 등 다양한 소재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좋았어요. 물론 힘이 들고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그땐 작업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어요.”


조각을 처음 알게 된 후로는 조각에서 손을 떼본 적이 없다는 그녀가 대학을 조소과로 지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학업성적, 실기시험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고 다녔을 만큼 학업에 대한 더 큰 욕구와 기대가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만든 작품이 San Francisco Art Institute가 주관했던 Competition에서 일등을 해 현재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것이 조각 공부에 더 매진하도록 만든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을 준비했어요.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혼자 외국에 갈 수 없다며 맞서시던 부모님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서 남편감을 찾던 중에 마침 유학 준비를 하던 같은 학교 상대를 졸업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어요.”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예술가에게 많은 것을 내려놓도록 요구했고 작품활동을 하기에는 예기치 않은 변수들이 많았다. 딸, 아들 두 아이가 생겼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는 가정주부로 살기에도 벅찬 일과들이 이어졌다.


“결혼 초부터 둘째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가정주부로 살았어요. 유학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엄마로서 자식은 또 열과 성을 다해 키워야 하잖아요.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Brooklyn Art Institute에 진학해서 서양화, 미술사 등을 공부했는데 미국의 저명한 추상화가이자 조각가인 Jerry Samuels 교수께 사사하였어요. 이후 FIT의 Richard McKelway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구요. 학위를 얻겠다는 욕심보다는 뛰어난 교수님들께 제대로 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늦은 나이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1995년 초반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크고 작은 전시회를 연중 이어갔다. 서양화가 김아토 씨와 유리 작가 유충목 씨가 함께했던 Elemental 3인전을 해마다 한 차례씩 열어왔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양화가 김옥지 선배와 함께 2인전을, 또 서울대 동문으로 구성된 그룹전시회는 2년에 한 번씩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며 함께 작품활동을 해 온 많은 외국 아티스트들과 함께 크고 작은 로컬전시회로 작업의 맥을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올 연말에 있을 한국영사관 주관 이태리 밀라노 전시회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고, 내년에는 플로렌스까지 추진 중이다.


“십 대에 조각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조각을 멈춰본 기억이 없어요. 제가 이름을 널리 알리거나, 작품을 팔거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좀 없는 편이라 활동에 비해 기록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그저 작품만 하고 싶을 뿐이에요.”


예술가로서 이런 왕성한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판매되거나 세상에 알려지는 일에는 좀 둔감한 편이다. 스스로 충족되지 않는 작품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늘 그녀를 작업대로 이끌었을 뿐이지 세상의 평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탓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들인데, 대중성과 예술성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가는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저도 작품을 판매해 봤고, 돈을 번다는 것보다 누군가 내 작품을 좋아해 주면 기쁘죠. 아마 예술 활동을 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의 딜레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흔히 다 아는 이야기 하나 해볼까요? 37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1,0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긴 반고흐는 그의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어요. 그렇게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말이죠. 만일 그가 그림을 팔아 생존을 해결하길 원했다면 상업적인 그림을 그렸어야 옳았겠죠. 그러나 아무리 가난과 배고픔에 휘둘렸어도 그는 자기의 예술적 가치나 의지를 꺾지 않았어요. 누가 봐도 불행한 삶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게 순전한 예술가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상업적 미술에 자신을 팔지 않는 예술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는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면 예술가로서 그것보다 더 큰 명예는 없겠죠. 그렇다고 해서 대중성에 초점을 두고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래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화가 나요. 대중에게 소통을 강요할 수 없듯이 예술가에게 소통 거리를 제공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어떤 감성적 직관은 다수의 통합적 공감하고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대중이 건네는 아주 작은 소통이라 할지라도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플라톤의 미학이나, 예술철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정신이라면 대중적 지지 이전에 예술 행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들은 대중성과 작품성이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 작품은 생명이 없다고도 한다. 또는 내가 추구하는 작품성을 쫓다 보면 대중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보다 앞서는 것은 작품을 하는 예술 행위이고 장수영 씨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행복할 뿐이다.


장수영 씨의 작품에는 인체 조각상들이 많다. 현대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신체의 미적 비율을 깨고 다양한 변형, 파격적 변신 등을 꾀하는 감각적 작품들도 많지만, 현대 작가로 불리는 장수영 씨의 작품들은 오히려 고전적이다. 모더니즘의 파격 혹은 변형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인체의 사실적 재현에 가깝다. 더러는 고대 근동의 여신상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미술사에 있어 사람의 신체는 미술가들에게 오랜 탐구의 대상이자 작품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어 왔는데요, 표정, 몸의 형태, 손 모양, 제스쳐 등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Expression을 담아내기에 좋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저도 인체 조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추상 작가이고 혁신적 변형은 아니지만, 추상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술가란 직업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술가마다 서로 다른 성향이 있고, 어떤 태생적인 능력이 따로 있다고 믿는데요, 저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욕구를 조각이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 작품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일부분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제 작품의 Theme 이기도 한데요, 보시는 분들도 작품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그리고 정신을 공감해주신다면 작가로서 더 큰 바람은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작업이 자신을 치유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작은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짧게 말한다. 내면에 평안함이 깃드는 시간, 그곳이 바로 그녀의 케렌시아라고.


“책에서 읽은 얘긴데요, 스페인의 투우장에 가면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가 잠시 쉬는 공간이 있다고 해요.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인데, 그곳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힘을 추슬러 다시 투우장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치열한 경계 가운데서 마지막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 그곳을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한대요. 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제가 작업하는 공간과 시간은 제게 그런 곳과 같아요. 내가 위로를 얻고 나의 내면에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거든요. Jerry Samuels 교수님을 통해 예술 행위가 주는 치유의 능력에 대해 깊이 있게 배우기도 했지만, 작업이라는 실제적 행위를 통해 제가 번번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끼거든요. 요즘은 예술치료사, 예술보건소, 뭐 이런 용어들을 쉬이 들을 수 있는데, 예술이 한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된 개인을 통해 가족이 치유되고 더 나아가 사회까지 치유해내는 힘이 있다고 저는 믿어요. 제 작품을 감상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작은 위로, 혹은 치유, 평안함이 전해지면 좋겠어요.”


그녀의 남편이 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단다. “ 여보, 그건 상식이야.” 그런 말을 듣는 그녀는 혼란스럽다. 예술가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러는 현실과 괴리가 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괴리감이 작품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정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회계사 남편이 깨닫기는 좀 어려워 보인다.


“수많은 훌륭한 조각가들이 있지만, 저는 특별히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데요, 그 사람은 조각을 하기 위해 대리석 덩어리를 마주하면 그 돌 안에 갇힌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고 해요. 그는 돌을 깨고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자유롭게 놓아준다고 하거든요.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세상 모든 사물을 예술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그것이 상식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태생적 재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편 이야기를 하다 말고 우리는 잠시 웃었다. 최근 Mikhail Jekin Gallery에서 로컬 전시회를 마친 그녀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중에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단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것,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것으로 자꾸 마음이 흘러간다고. 이기가 이타로 옮겨가는 변곡점일까?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는 이타란 과연 어떤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된다. 긴 대화를 마치고 작품이 놓인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엔 여전히 비.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일부라던 그의 조각들이 하나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인터뷰, 글 Young Choi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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