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ng Choi Editor

요절한 천재 예술가, 장-미셸 바스키아 전시회(‘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


Courtesy of Milled.com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


지난 4월 초, 첼시(Chelsea)의 스타렛-레하이(Starrett-Lehigh) 빌딩에서 개막된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이어왔던 장-미셸 바스키아의 기존 전시회와는 결을 달리하는 독특한 전시회로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전문 큐레이터에 의해 기획되는 대다수의 전시회에 비해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는 그의 가족에 의해 구성된 기획 전시회라는 점과 그동안 한 번도 전시에 소개된 적이 없거나 자주 볼 수 없었던 작가의 작품들이 대거 전시된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Courtesy of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

전시회를 준비하던 장-미셸 바스키아의 여동생, 리사네 바스키아(Lisane Basquiat)는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바스키아의 드로잉과 그림 등 약 200여 점이 소개되며, 특히 멀티미디어 프리젠테이션 등과의 접목으로 색다른 전시를 경험할 수 있으며, 소개되는 작품들이 대다수 장-미셸 바스키아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가족적인 내밀힘을 표현한 것들이 많아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는 9월5일 노동절(Labor Day)까지 이어진다.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Courtesy of NYT

뉴욕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미셸 바스키아는 성장 과정을 통해 유색 인종으로서의 차별과 질시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7세의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이혼으로 가출과 방황을 이어가다 끝내 학교를 뛰쳐나온 후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1980년대 당시에 유행하던 브레이크 댄스, 레게, 힙합 등의 흑인 문화와 펑크족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당시 슬럼가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10대들의 낙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픈 경험과 억눌린 반항 의식이 담겨 있다. 과 억눌린 을 담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인종주의,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해부학 등 다소 충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 단순히 낙서로 치부될 수 있을 법한 그림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Fallen-Angel, 1981 > Courtesy of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

이러한 장-미셸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그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The Factory'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워홀의 도움으로 장-미셸 바스키아는 유명 화가에 반열에 들어서게 되고 전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게 된다. 그러나 워홀과 함께 기획했던 공동 전시가 크게 실패하고 덩달아 악성 루머에 시달리던 중에 27세의 젊은 화가는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Jailbird, 1983> Courtesy of ‘Jean-Michel Basquiat : King Pleasure’

천재 예술가로서의 짧은 생을 마감한 장-미셸 바스키아는 뉴욕 그래피티에서 영향을 받아 팝 아티스트로 성장한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함께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리피티 아티스트로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그래피티를 추구하는 로컬 아티스트들에게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화가다.


자료 출처: nyt.com, wikiped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