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int Jung, Writer
책장을 둘러보다가, January Essay by Clint Jung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디지털 파일로 구입하고 온라인으로 즐기는 소비 트렌드가 확대되고 있다. MZ 세대가 이끄는 소비시장의 변화는 그간 즐겨온 아날로그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일반적인 장르 소설이나 재테크 책들은 E 북으로 대체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내가 물리적인 책을 여전히 더 사랑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선, 기억에 남는 유통기한의 차이가 있다. E 북보다 기억의 휘발성이 덜하다. 또한,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밑줄을 긋는 즐거운 행위를 이어갈 수 있다. 질감과 무게를 통해 책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오랜 기간 소장해 오면서 세월과 손때가 묻은 개인의 소장품들은 순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오브제로 남는다. 설령 그것이 대량생산된 공산품이거나 밀리언 셀링된 책이라 할지라도. 아날로그를 통해 전달되는 정서는 아직은 대체 불가다.

애정이 담긴 책들은 놓을 수가 없다. 우선 처음 미국에 올 때, 공항으로 떠나기 전 서점에 잠시 들러 내용도 모른 채 구입했던 책들이 있다. 라디오만 틀면 나오던 광고들 중에 유독 책 광고들이 많았었는데, 별밤을 듣다가 들려오던 나긋나긋한 성우들의 목소리로 알게 된 에릭 시걸의 <닥터스>와 쥬디스 크란츠의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다. 이제 미국에 가면 한글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집어 든 책들이 하필이면 영미 번역 소설이라 아이러니하긴 했다. 비행기 안에서 애틋하게 읽고 나서 뉴욕에 도착해 보니 버젓이 한국 서점들이 있었다. 이 책들을 볼 때면 그때의 나의 무지함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2000년대 중반 파리 배낭여행 때 샹젤리제 거리에 있던 북스토어를 들렀던 적이 있다. 르네 고시니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꼬마 니콜라> 특별판을 전면에 전시하고 있었는데, 책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이나 들었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책값이 얼마나 했겠냐마는 불어가 발목을 잡았다. 누군가 이 책을 내 책장에서 발견한다면 읽지도 못하는 불어책을 전시용으로 샀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돌아가면 한글판으로 구입하자고 생각하며 내려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점에 들렀으나 한국에서는 꼬마 니콜라가 단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반즈 앤 노블에서도 영문판조차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다시피 아마존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버젓이 <꼬마 니콜라> 단행본이 판매되고 있었다. 역시 아마존이구나 하고 신나서 구매 버튼을 바로 눌렀다. 며칠 뒤 배송된 책을 펴보니, 불어판이었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것도 운명인가 싶어 반품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채 지나지 않아 르네 고시니의 미발매된 원고가 발견되어 <돌아온 꼬마 니콜라>가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우리들의 노스텔지어, 장자크 샹뻬의 그림도 여전히 함께했다. 그때 바로 구입해서 애장하게 되었다. 얼마 뒤 오리지널 시리즈도 다시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못 들은 척 구입을 지금껏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아내가 임신했었을 때 꺼내 읽어 준 책 중 하나인 박민규의 <삼미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애착이 가는 책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읽었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태교한다고 조곤조곤 읽어주다가 거의 자지러질 뻔했다. 너무 웃겨서 눈물을 쏟고 결국 배를 움켜쥔 아내가 이러다가 조산할 수도 있겠다며 막는 바람에 초반부만 읽다가 멈추고 말았다. 이 책 제목만 봐도 그때가 플래시백 된다. 평소에 잘 웃는 딸아이를 보면 그때의 낭독들에 귀 기울였음이 분명하다.

집집마다 책장은 사라지고 대화의 주요소재였던 책도 더이상 관심 거리가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구독 서비스가 대세이고 책도 음악도 영화도 모두 온라인에 소장하는 시대, 상대의 관심사를 알려면 SNS를 뒤적거려야 하는 현실이긴 하다. 그래도 누군가 우리 집을 방문한다면, 책들에 관심이 있다면, 난 이 책들을 하나둘 꺼내 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 같다. 여전히 대면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접촉이 이루어지는 교감으로 무언가 알아가고 싶어 하는, 나는 아날로그 정서를 가진, 내 취미는 독서 감상이다.
Clint Jung, Writer

Stonybrook University 졸업
뉴욕에서 십여 년째 라이센스 제품 제조·판매업체에서 근무 중. <겨울>, <계절 음악>, <나, 그 정체>, <아동심리>, <One Day> 시집을 출간했고, 시와 책 관련 에세이를 기약 없이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