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ng Choi Editor
화가 박한홍(Hanhong Park), 그의 예술에 스며들다
미술이란 원래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행위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베끼는 단순한 모방행위가 아니라, 예술가적 시각과 사유를 담아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해내는 담금질의 과정이 필요하다. 화가 박한홍, 그는 ‘비’라는 일상적이고도 친근한 소재에 접근해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화가다. 비가 오는 현상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그 풍경 안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있고, 슬픈 기억조차 아름다움이 되는 감정의 승화가 녹아있다. ‘예술은 시각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끌레(Paul Klee)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잊고 있었던 오랜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 조용한 끌림이 있고, 마침내 가만히 스며들게 된다.

인터뷰를 위해 빗길을 달려 화가 박한홍 씨의 자택에 도착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작품이 집 안 곳곳에 걸려있어서 마치 작은 갤러리를 연상케 했다. 인터뷰 전에 잠시 그의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창밖에 내리는 비 풍광들을 캔버스 위에 재구성해놓은 그의 작품들은 잠시 세상 밖과 안의 경계를 잊고 마치 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는 얼마 전 11번째 개인전을 마친 중견작가지만 이제 갓 등단한 화가처럼 풋풋함과 진지함으로,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림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던 시기
초등학교 때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막연히 그 친구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그림이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림보다 운동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훗날 그림을 그리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군 복무 중에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고, 복무를 마치고 예술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단 한 번도 그림이 아닌 삶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특별히 ‘비’라는 소재에 매료된 이유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계기로 비를 그리게 되었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비를 소재로 택하기 전에는 부서진 아스팔트를 주로 그렸다. 색감도 그렇지만 늘 부서진 아스팔트를 들여다보며 묘사하다 보니까 마음이 많이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그러다 우연한 일로 비 내리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너무 예쁘다는 느낌을 받았고, 표현하고 싶어져서 비를 그리게 되었다. 비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움, 추억과 같은 내밀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라서 그런 것 같다. 내 작품을 보신 많은 사람들로 부터 정적이고 차분해서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작업과 작품의 특징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케치를 따로 하지 않는다.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들이 캔버스에 도달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캔버스에 곧바로 밑그림을 그린다. 스케치 전에 그려야 할 소재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거기서 느끼지는 그 느낌을 그대로 지닌 채 화면을 구상하면서 작업을 시작한다. 스케치할 때는 아주 빠른 속도로 붓을 움직이며, 오일페인팅을 중첩하여 재료 자체의 특징과 맛을 최대한 살려낸다. 또 비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블루 계통의 회색을 오일과 함께 단계적으로 표현하고 그 위에 차 유리에 부서지는 비의 컬라나 길 위에 비친 불빛의 색깔을 빠른 터치와 함께 흘러내리듯 표현한다. 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오일페인팅이지만 수채화 같은 맑은 느낌으로 물에 젖어있는 상태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작업을 할 때는 모든 세상을 비로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린다.
현재 작업 중인 작품들
요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작품들은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에 집중했던 이전 작품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비’, 혹은 ‘비 오는 거리 풍경’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Theme을 차용하지만, 풍경이나 사물의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 묘사에 좀 더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Rain-Recollection은 비 내리는 맨해튼의 풍경을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으로 접근했다. 마치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흑백의 무채색에 옅은 컬러를 덧대어 교차하는 두 개의 시점을 하나의 화폭에 담았다. 또, Chaos라는 작품은 요즘 시대 상황과 잘 맞지 않나 생각한다. 마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혼돈의 현실’과 한 때 공황장애로 불안을 겪었던 스스로의 경험을 작품에 투영했다. 도심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무수하게 오가는 차들, 그 풍경 위로 지나간 시간들이 오버랩되어 겹치는 이미지에 온갖 컬러들이 함께 섞이는 순간을 구상하며 작업했고, 캔버스 위에 구상을 쏟아내는 동안 이 작품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해방과 탈출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업에 임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화가로서의 소회
화가들에게 작업이란 아마도 자신이 쉴 수 있는 곳, 또 숨을 수 있는 곳, 그리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어느 곳에서 작업을 하든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미국에서 그림을 그린 지도 어느덧 1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선 미국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예술의 중심지 뉴욕이라는 이점 때문에 여러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만나볼 수 있고, 훌륭한 작가들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인 화가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한인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요즘은 생활에 여유가 있는 한인들도 많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한인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사실, 예술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나 컬렉터가 될 수 있는데, 한인들이 그런 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한인 작가들의 전시회에도 자주 찾아주시고, 작품도 구입해줌으로써 그 작가가 어떻게 성장해나가는지를 알 수 있고, 한인 작가들이 미 주류사회로 뻗어나갈 기회도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이 늘 아쉽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 그 이유
좋아하는 화가가 많다. 그중에서도 고흐의 작품에서는 특별히 그의 붓 터치를 좋아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도좋아하는화가중한명이다. 클림트미술의예술적인부분은차치하고라도작품하나하나에담긴개성, 그리고자신에대한세상적인평가에결코일희일비하지않고자신의예술을올곧게표현한예술가적정신을특히좋아한다. 또빛의마술사로알려진피에르 보나르를 비롯해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내 작업이나 화법에 특별히 영향을 준 화가는 없다.

그림을 제대로 관람한다는 것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데 내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봐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림을 보려면 뭘 좀 알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 “그림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작가가 뭔가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화가의 몫이라면 그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물론 때로는 뭘 알고 봐야 하는 지식적인 접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작품을 대할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첫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면, 작가에게 작업 의도, 작품에 담긴 의미를 물어보고 관람해도 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예술작품이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관람가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무엇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든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예술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화가로서 앞으로의 계획
전업 작가로 살면서 한국을 비롯해 LA, 뉴욕 그리고 로마, 프랑스 등지에서 전시회를 하며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지난해 11월에 맨해튼에 위치한 4W 43 Art Gallery에서 11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사실 그동안은 비를 소재로 한 그림을 비롯한 일상적인 소재의 사실적 묘사에 포커스 해왔었는데, 앞으로는 작업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비를 소재로 한 작품 외에도 습기 찬 풍경들, 어둠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등 다양하게 범위를 넓히고 있고, 좀 더 나아가 압스트랙 아트(Abstract Arts)도 시도하려고 한다.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전시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지만, 작업실에서 기존의 작업 방식에서 조금 탈피한 새로운 화법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2023년 봄에는 한인들이 밀집한 한인 타운 내 갤러리에서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또한 한국에서의 전시 기획도 구상 중이다. 앞으로도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처럼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업하면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고 싶다.
박한홍 화가

대구예술대학 졸업, 2005년 도미. 이태리 로마 Spazio 88 gallery,페루자 Alessandro Berni Gallery. Tra Metropole e Museo (CentrobStui Capplla Orsini) 뮤지엄 전시, 프랑스 모나코 Kamil gallery, LA, Santa Monica Museum Lanisha Cole Gallery 전시, 뉴욕 첼시Henoch Gallery, Nabi Gallery 소속작가로 활동 등 11회 개인전 및 30회가 넘는 그룹전에 참여. 현재 이태리 로마 Formed Artetalia 소속아티스트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