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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Choi Editor

1969년, Memories of Woodstock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콘서트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이 전설처럼 회자되어 온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1969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사랑과 평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나흘간 뉴욕주 베델(Bethel)에서 진행되었던 정식 명칭 ‘Woodstock Music & Art Fair’는 ‘미국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락 페스티벌이자 모든 락 페스티벌의 시초로, 당시 미국을 휩쓸던 히피 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John P. Roberts, Artie Kornfeld, Joel Rosenman, 그리고 Michael Lang 등 네 사람이 만든 기획사 Woodstock Venture가 주최한 이 행사에 약 45만 명의 군중이 참여했으며, 당시로는 전대미문의 초대형 공연이었다고 한다. 현시점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45만 명이 그다지 큰 숫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1969년 당시에는 교통도 원활하지 못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한 장소에 모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던 시절이었다.

Courtesy of @woodstock 1969

50년 전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

당시 뉴욕 업스테이트에는 이 행사를 유치하도록 장소를 허락하는 곳이 없어서 행사 출발부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 히피들의 음악 페스티벌이란 게 얼마나 낯설고 거북스러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당시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Yasgur 라는 사람이 Bethel에 있는 자신의 땅을 빌려주어 공연은 마침내 성사된다. 그러나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티켓이 팔렸을 뿐만 아니라, 팔린 티켓 수에 서너 배가 넘는 군중이 밀려들면서 공연장은 삽시간에 통제 불능의 난장판이 되었고, 특히 8월의 기상 악천후로 인해 예상치 못한 수많은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Courtesy of @woodwtock 1969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 티켓값은 그 당시 8불(현재 가격 약 60불)이었는데, 뉴욕 전역에 있는 레코드사에서 티켓 발매를 시작한 지 단 하루 만에 약 18만 5천 장이 팔려나갔다. 당시 주최 측에서는 관객을 수용할 숙소와 식당 등을 전혀 구비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콘서트가 열릴 스테이지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 때문에 콘서트는 일정대로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울타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공연장은 티켓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자동차를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행사장으로부터 약 17마일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무려 8시간을 걸어서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이들 무리의 차량이 고속도로를 뒤덮는 바람에 뉴욕 주 정부에서는 고속도로 통행을 차단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Courtesy of @woodwtock 1969

공연이 시작된 8월 15일 당일부터 베델 일대에는 물과 음식이 다 소진되어 주최 측에서는 도심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헬리콥터로 공수하기에 이른다. 목욕탕과 화장실이 없어 공연장 근처의 필피피코라는 작은 연못이 대중목욕탕이 되어버렸고, 게다가 주말 내내 큰 비가 내려 콘서트장 근처는 진흙바다가 되었지만 낙천적이고 행복한 히피들은 물 웅덩이에서 수영을 하고 머드에 뒹굴며 종일 낭만적인 놀이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3일 밤낮으로 이어진 공연에는 무려 32차례의 콘서트가 펼쳐졌고, 미국 역사가 가장 유명한 뮤지션, Janis Joplin, Sly and Family Stone, The who, Jefferson Airplane 등이 참여하였으며, Crosby, Stills, Nash & Young, 그리고 Jimi Hendrix가 마지막 콘서트를 장식했다.


45만 명을 하나로 잇는 매개 ‘음악’

Courtesy of @woodwtock 1969
Courtesy of @woodwtock 1969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반전 시위를 하던 히피들, 베트남 반전 운동가, 인권 운동가, 동성애 운동가, 반정부 시위대, 마약 합법화 지지자, 반 마약 합법화 등 다양한 인종 45만 명이 운집했던 공연이었다. 그들은 비록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모인 이유는 오직 ‘음악을 듣겠다’는 동일한 일념 하나 뿐이었다. 음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종도 사상도 국경도 언어도 초월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이자 사람의 마음을 뿌리째 흔드는 강력한 힘인 것이다. 특히 공연의 말미를 장식한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마지막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미국 국가를 연주했는데, 기타 이펙트를 이용해 비행기 폭격기 소리를 연출하며 베트남전과 미국을 풍자해 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엄청난 무리의 사람이 동시에 모였지만, 3일간의 축제 기간 동안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두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는 등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낳으며 모든 행사는 무사히 종료되었다.

공연 이후 콘서트장은 쓰레기 처리 비용으로 100,000불을 소요했으며 Woodstock Venture 기획사는 약 140만 불의 빚을 지게 되어 지역 농민들에 의해 고소 분쟁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이후 우드스탁 공연 관련 자료와 기록물, 영상 저작권과 다큐멘터리 저작료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게 된다. 이후 베델은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행사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우드스탁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1984년에 기념비를 세웠고, 1997년부터 관광지로 개발, 2008년에는 베델 우드스탁 음악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Jimmy Hendrix, Guitarist. Courtesy of Richmond Times
Movie, Taking Woodstock. Courtesy of Film Jerk

우드스탁을 회고하는 책과 영화는 그동안 다양하게 제작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엘리엇 타이버의 회고록 ‘테이킹 우드스탁(Taking Woodstock)은 한때 무산 위기에 처했단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어떻게 무사히 개최되어 전설로 남게 되었는지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엮은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꼽힌다.


자료 출처: woodstock.com, Wikipedia, bethelwoodstockcenter.com, instagram @woodstock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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