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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INT JUNG, 북 칼럼니스트

6월의 책,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

배심원에 참여하라는 메일이 왔다. 일전에 한 번 미뤄서 재차 미룰 수도 없는데, 백신을 맞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으로, 인종혐오 범죄가 들끓는 요즘에 어떻게 법원으로 호출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지 모르는 긴 시간을 대비해서 책 한 권을 가방에 미리 챙겨 넣었다. 안내방송을 듣느라 장시간 집중하기 어려울텐데 달달한 연애소설이나 읽으면서 지루함을 견뎌보자고.

글, Clint Jung, Book Columnist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Courtesy of neuvilbooks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55p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첫눈에 표지 디자인에 반한 책이다. 요즘 다시 유행하는 시티팝 음악이 연상되는 그 분위기가, 대도시의 고독함 속에 핑크빛 사랑 한 점 찍은 것 같은 그림 같아서, 좋아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이 떠올라서 주저 없이 골랐다. 젊은 작가의 짧은 출판 인터뷰 영상과 책 표지와 책날개에 쓰인 이력과 추천사를 가볍게 눈으로 스캔했던 것은 덤이었고.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책은 수백 명이 앉아있음에도 고요하던 배심원 대기실에 들어가서야 꺼낼 수 있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예상 대로 연애소설이었다. 그런데 뭔가 기껍지 않은 마음이 앞서 도입부 몇 문장들을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걸까? 기대했던 핑크빛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조금은 결이 다른 퍼플빛의 사랑이야기였으니까. 말로만 듣던 퀴어 문학을 읽게 될 줄이야. 백신 주사를 맞았던 어깨 부위에 다시 통증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유교의 나라 한국이 언제 이렇게 개방되었나? 내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을 불편함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아무런 대안도 없다 지금 내 가방 속엔. 인터뷰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은 출판사와 작가에 대한 원망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니 차마 원망을 계속할 수도 없다. 참 당황스럽네. 성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변화가 요구되는 요즘 괜히 나만 시대착오적인 낡은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까? 더욱이 이것이 불온서적이나 금서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아우성치는 가운데서도 나는 묵묵히 책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90p


작가의 자전소설처럼 보이는 <대도시의 사랑법>은 4편의 단편으로 엮인 연작소설이다. 대학 시절 만난 동거를 하던 주인공 ‘나’의 여사친, 재희의 결혼식에 그가 초대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매일 술에 절어 다른 남자를 만나며 자유롭게 살던 재희와 마찬가지로 매번 다른 남자를 만나며 자유롭게 살던 주인공 ‘나’는 사회의 통념으로서는 인정받기 어려웠던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거를 시작했었다. 절대 결혼은 안 할 것 같았던 그녀였는데, 결혼을 한다고 했고 ‘나’에게 축가를 부탁했다. 재희와 함께한 시절을 추억하며, 결혼식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사랑이었을 지 모를 지난 감정을 돌아본다. 암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다가 5년 전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졌던, 나이가 한참 많던 운동권 출신의 형을 떠올리며 쓴 ‘우럭 한점 우주의 맛’ 편이 이어진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자신의 HIV 감염으로 인해 결국 헤어져야 했던 규호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 뒤엔, 규호와 헤어진 뒤, 그와 다녔던 방콕 여행의 발자취를 짚어보며 그리워하는 ‘늦은 우기의 바캉스’ 편으로 이어지며 마무리를 짓는다. 스토리마다 사랑의 대상이 등장하고, 이어나갈 수 없었던 사랑에 아파한다. 보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는 것과는 좀 다른 색깔의 상황들이 이어진다. 애틋하게 사랑하고, 욕망에 이끌리는 난잡한 만남과 방황의 연속, 거기다 고독과 슬픔이 뒤따르는 로맨스의 전형에다 암 투병, 불치병 (여기서는 HIV),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사람 등 소설의 단골 소재들이 진부하게 얽혀있지만, 그 위에 ‘퀴어 코드’라는 낯선 배경 하나를 덧대니 전체적인 스토리가 결코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의 사랑의 상대가 이성이었다면, 나란 독자의 입장에서 좀 더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상상했다. 철저한 삼자의 위치라는 벽을 치는 것이 아닌, 같이 사랑에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었을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고지식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을 불편함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나면 결국 사랑 이야기가 남는다. 바라보는 사랑의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그 어떤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다. 퀴어를 들어낸다면, 아니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충분히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아프고, 고단한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담겨있는 소설이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절망과 혼란스러움이 기억났다. 그보다 현재진행형에 가깝게 진화된, 퀴어의 색채를 띤 연애 성장 소설이라면 대충 설명이 맞겠다. 여전히 어렵다.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다는 것.


이제는 난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

취업도 글쓰기도 연애도 무엇도 권태롭지 않은 게 없고.

그런데도 나는 왜 이상하게, 자꾸만 네 이름을 쓰고 싶은 걸까

지독히 일상을 닮아 있는 또 다른 한 명에 불과한 규호, 너의 이름을 말이야 -205p


Photo By Clint Jung

작가: 박상영

스물여섯 살 때 첫 직장에 들어간 이후 잡지사, 광고 대행사, 컨설팅 펌 등 다양한 업계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나들며 7년 동안 일했다. 2016년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가로 데뷔했고, 2019년 문학동네 제10회 젊은 작가 대상, 제11회 허균 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에세이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가 있으며 《대도시의 사랑법》은 출간 전에 이미 영국 Tilted Axis Press와 번역 출간 계약이 이루어졌다.


Clint Jung, Book Columnist


Stonybrook University 졸업

뉴욕에서 십여 년째 라이센스 제품 제조·판매업체에서 근무 중. <겨울>, <계절 음악>, <나, 그 정체>, <아동심리>, <One Day> 시집을 출간했고, 시와 책 관련 에세이를 기약 없이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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