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int Jung, Writer
A Man in New York-Essay by Clint Jung, Writer
추위가 가시지 않던 3월 중순, 롱아일랜드의 항공우주박물관(Cradle Of Aviation Museum)에서는 보드게임 박람회(Long Island Tabletop Gaming Expo)가 열렸다. 매년 8월경에 열리던 고전 게임 박람회(Retro Gaming Expo)의 한 부문으로 참여해오다가 관람객들의 높은 호응으로 2년 전부터 독립된 박람회로 열리고 있다. 판매 부스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미니어처 롤플레잉 게임들,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라이브 던전 게임과 방 탈출 체험관이 만족스러웠다. 2층에는 8~90년대를 풍미했던 아케이드 게임들을 전시했다. 전부 무료 플레이가 가능했다. 눈 감으면 하늘에서 테트리스 블록이 떨어지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지금은 PC와 콘솔, 스마트 폰, 심지어 VR 기기들이 언제든지 실행 대기 상태지만, 그때와 같은 즐거움의 향연은 없다. 당시의 친구들이 함께할 수 없으니까. 사회에 나와 만나게 된 이들은 친구라 호칭하기가 쉽지 않다. 지인과 친구의 거리는 의외로 멀다.

며칠 전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으로 뉴욕 출장이 잡혔는데, 내 생각이 났단다. 반가웠다. 옛 친구는 언제나 그리웠다. 친구가 전부였던 학창 시절을 보냈으나, 타지에서의 사회생활 연차가 늘면서 유대관계가 소원해졌다. 오랫동안 뉴욕에 붙박이처럼 살아왔기에 동창 친구들의 연중 모임도 참석하지 못했다. 생일이나 연말이 되면 생사를 확인하듯 문자만 나누던 차였다. 금요일 오후 K타운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일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출퇴근 시간을 피해 버스를 탔다. 2019년 이전에 비해 유동 인구는 체감상 반도 안 되는데 흔히 보였던 관광객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창밖으로 한산한 인도와 폐업한 상점이 줄지어 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 차도는 막혔다. 5번가는 여전히 상습 정체 구간이었다. 버스는 센트럴 파크와 록펠러센터를 지나 한 시간 반가량 지나서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닿았다. 고려서적 앞에 서서 기다리던 그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멀찌감치서부터 바로 알아보았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설어졌다. 예전과 다르게 두툼히 오른 살과 눈가의 잔주름. 익숙지 않은 그의 나이를 반증하고 있었다. 감미옥에서 이미 점심을 했다고 해서, 메이시스 백화점, 브라이언 파크, 뉴욕도서관 일대를 걷다가 37번가에 있는 독일 맥주 바 라이헨바흐 홀(Reichenbach Hall)에 들어갔다. 라거 두 잔과 한 아름만 한 프레츨을 주문했다. 프레츨의 소금 알갱이를 떼며 맥주를 홀짝이던 친구는 반나절의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둘이 어울릴 만한 기회가 없었다. 졸업 이후 동창회가 자주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지구 반대쪽이 쉬이 참석할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깊게 알지 못했던 서로의 인생사를 털어놓으며, 각자의 삶을 이해하려 했다. 박제해 두었던 아련한 감정과 이야기들이 풀려났다. 동급생 시절을 얘기할 땐, 집이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녔기에 친구들과 방과 후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중학교 때 이사해서, 학교까지 30~40분씩 버스를 타고 다녔어. 회수권을 잃어버리거나 버스비가 부족할 때면, 한 시간 반 넘게 걸어 다니기도 했었지. 고등학교도 멀리 다녔고. 그때 참 한없이 걸어 다녔는데…. 지겨운 군대 이야기, 대부분 실패하는 첫사랑 이야기, 진학과 취직, 결혼과 육아. 인생의 갈림길에서 좌지우지했던 많은 일들을 돌아보고 나니, 어느덧 이 자리에 와 있다.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마셔도 취하지 않던 맥주 때문인지 이국에서 만난 친구 때문인지.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이 무색해지리만큼 시간은 잘 흘러갔다. 깊은 밤이 돼서야 우린 다음을 기약했다. 다시 또 볼 수 있겠지, 친구. 숙박하고 있는 홀리데이 인에 바래다준 뒤 버스를 타러 갔어. 겨울비도 봄비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데,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어. 외로워졌네.
Clint Jung, Writer

Stonybrook University 졸업
뉴욕에서 십여 년째 라이센스 제품 제조·판매업체에서 근무 중. <겨울>, <계절 음악>, <나, 그 정체>, <아동심리>, <One Day> 시집을 출간했고, 시와 책 관련 에세이를 기약 없이 집필 중.